록히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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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록히드 사건은 1970년대 미국 록히드사가 해외에서 군용기 판매를 위해 뇌물을 제공한 사건으로, 미국, 일본, 네덜란드, 이탈리아 등 여러 국가에서 발생했다. 록히드는 F-104 스타파이터 등 항공기 판매를 위해 뇌물을 제공했고, 특히 일본에서는 전일본공수에 L-1011 트라이스타 여객기 판매를 위해 고위 정치인과 관료에게 뇌물을 제공한 사실이 드러났다. 이 사건으로 록히드 이사회 의장과 회장이 사임하고, 미국에서는 해외 부패 방지법이 제정되었다. 록히드 사건은 미국의 음모라는 주장과 함께, 뇌물 수수 및 사건 처리 과정에 대한 다양한 의혹이 제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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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히드 사건 | |
---|---|
사건 개요 | |
사건명 | 로키드 뇌물 스캔들 |
발생 시기 | 1970년대 중반 |
관련된 기업 | 록히드 (현 록히드 마틴) |
주요 내용 | 록히드가 해외 항공기 판매를 위해 외국 정부 관리들에게 뇌물을 제공한 국제적 부패 스캔들 |
파장 | 여러 국가에서 정치적 파문과 사법 처리 발생 미국 내에서 기업 윤리 및 해외 뇌물 방지 관련 법률 제정 |
미국에서의 조사 및 결과 | |
조사 기관 | 미국 상원 다국적 기업 소위원회 (Church Committee) |
주요 혐의 | 록히드가 일본, 서독, 네덜란드, 이탈리아 등 여러 국가에서 고위 관료들에게 거액의 뇌물을 제공 록히드의 내부 회계 부정 및 자금 세탁 혐의 |
법적 처벌 | 록히드는 미국 정부에 의해 거액의 벌금 부과 일부 임원 및 관련자 형사 처벌 |
관련 법률 제정 | 해외 부패 방지법 (FCPA) 제정 |
관련 국가별 사건 | |
일본 | 다나카 가쿠에이 전 총리 등 여러 정치인과 기업인 뇌물 수수 혐의 '로키드 사건'으로 알려짐. 일본 최대의 정치 스캔들 중 하나 전일본공수 항공기 구매 과정에 뇌물 제공 혐의 |
서독 |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 국방장관이 록히드로부터 뇌물을 받았다는 의혹 제기 정치적 논란 및 불신 야기 |
네덜란드 | 베른하르트 왕자가 록히드로부터 뇌물을 받았다는 의혹 제기 왕실의 권위 실추 및 정치적 위기 초래 |
이탈리아 | 여러 정치인들이 록히드로부터 뇌물을 받았다는 의혹 제기 정국 혼란 및 정치적 불안정 야기 |
기타 국가 | 사우디아라비아, 터키, 이란 등 여러 국가에서도 록히드의 뇌물 제공 의혹 제기 |
록히드 기업 자체 | |
기업 규모 | 당시 미국의 대표적인 항공기 제작 회사 중 하나 |
주요 사업 | 군용기 및 민항기 제작 항공우주 기술 개발 |
스캔들 이후 | 기업 이미지 크게 실추 대외 신뢰도 하락 경영진 교체 및 기업 구조조정 |
추가 정보 | |
사건의 영향 | 국제적인 기업 윤리 및 투명성 강화에 대한 요구 증대 해외 뇌물 방지 관련 법률 및 규제 강화 |
관련 사건 | 워터게이트 사건 등 1970년대 미국 사회의 부패 스캔들과 연관되어 언급됨 |
대한민국 관련 정보 | |
관련 정보 | 대한민국에서는 로키드 사건이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았지만, 국제적인 기업 부패 문제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움 뇌물 제공과 관련된 의혹은 있었으나, 대한민국 내에서의 사법 처리나 공식적인 조사는 진행되지 않음 |
2. 배경
1971년 미국 정부는 경영난에 빠진 록히드에 대한 재정 지원을 결정하고, 록히드가 은행에서 빌린 1.95억달러에 대한 지급을 보증하였다. 연방 긴급 대출 자문 위원회는 이 과정에서 록히드가 해외에 뇌물을 제공하고 이를 숨겼는지 조사하기 시작했다.[62]
록히드 사건은 미국, 일본, 서독, 이탈리아, 네덜란드, 사우디아라비아 등 여러 국가에서 발생했다.
1975년 말과 1976년 초, 미국 상원 의원 프랭크 처치가 이끄는 조사에 따라 록히드 이사회가 군용기 계약을 성사시키기 위해 우호적인 국가에 뇌물을 제공한 사실이 드러났다. 1976년에는 록히드가 "세기의 계약"으로 불린 록히드 F-104 스타파이터를 포함한 항공기 판매를 위해 2200만달러의 뇌물을 제공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62][63][64]
3. 각국의 록히드 사건
3. 1. 서독
1961년 서독 국방장관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가 F-104 전투기 구매 대가로 뇌물을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전직 록히드 로비스트 에르네스트 하우저는 슈트라우스와 그의 정당이 F-104G 스타파이터 900대 구매 대가로 최소 1000만달러를 받았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슈트라우스와 해당 정당은 혐의를 부인했고, 슈트라우스는 하우저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 결국 주장이 입증되지 않아 사건은 종결되었다.[65][5]
1976년 독일 연방하원 선거 기간 중 국방부 내 "록히드 문서" 분실 의혹이 제기되면서 논란이 다시 불거졌다. 익명의 출처를 통해 유출된 문서에 따르면, 국방위원회 소속 독일 하원 의원 만프레드 뵈르너가 록히드의 지원으로 미국 록히드 공장을 방문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66][6] 조사 결과, 스타파이터 구매 관련 문서가 1962년에 이미 파기되었음이 드러났다.[2]
미국의 록히드 문서 조사에 따르면, 뵈르너의 미국 방문은 독일에서 지원을 받았으며, 록히드 S-3의 시험 비행과 관련이 있었다. 뵈르너는 비서를 동행했으며, 비서의 여행 경비 일부와 뵈르너가 미국에서 귀국하는 항공편은 록히드에서 지원했다.[67][7]
3. 2. 이탈리아
이탈리아 공군의 C-130 허큘리스 수송기 구매와 관련하여 기독민주당 정치인들에게 뇌물이 제공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정치 잡지 L'Espresso는 전직 내각 의원 루이지 구이, 마리오 타나시, 전직 총리 마리아노 루모르, 전직 대통령 조반니 레오네가 연루되었다고 보도했다. 이 사건으로 조반니 레오네 대통령은 1978년 6월 15일 사임하였다.[68][8]
3. 3. 일본
일본의 록히드 사건은 마루베니 상사를 비롯한 일본 정치계, 산업계, 야쿠자의 고위층과 연계되어 있다. 1974년 다치바나 다카시가 분게이슌슈(일본 문예춘추)에 쓴 특종 기사로 뇌물을 주고받은 사실이 폭로됐다. 당시 뇌물을 받은 자들은 정치인 및 고위 관리들이었으며, 현직 수상이었던 다나카 가쿠에이도 뇌물 수수 혐의로 구속되었다. 록히드는 1976년 2월 6일에 사건 내용을 미국에 보고하였다.[69]
록히드는 전일본공수와의 계약을 위해 24억엔을 지불하였다. 이 중 5억엔이 총리에게 돌아갔으며, 1.6억엔이 전일본공수 관리들에게 돌아갔고, 17억엔이 고다마 요시오에게 돌아갔다.[70] 1972년 10월 30일 전일본공수는 대당 500만달러의 가격으로 L-1011 21대를 구매하기로 했다고 밝혔다.[71] 이 과정에서 전일본공수는 L-1011을 주문하게 되어 DC-10의 주문을 취소했고, 전일본공수의 주문 취소분은 터키항공이 MD에서 임차하게 된다.
다나카는 1976년 7월 27일에 구속되었으며, 2억엔 보석으로 석방되었다. 1983년 10월 12일 도쿄 대법원에서는 외환 관리법에 의하여 유죄를 선고받았으나 뇌물로 유죄를 선고받지는 않았다. 4년 징역형이 구현되었으나, 1993년 죽을 때까지 참정권을 가질 수 있었다.[72][73]
현직 수상이 뇌물을 받아 구속된 록히드 사건은 일본 사람들에게 1955년 이후 38년간 집권한 일본 우파 정당인 자유민주당 정권에 대한 불신을 심어 주었고, 초등학교 졸업의 짧은 학력을 극복하고 수상이 되었다는 다나카 가쿠에이 신화에 대한 환상을 깨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전일본공수의 L-1011은 별다른 사고 없이 운용된 후, 1995년에 모두 퇴역했다.
1970년 11월에 초비행을 하고 1972년 4월에 운항이 시작된 L-1011 트라이스타는 대형 항공기 제조 회사인 록히드 사가 자사 최초의 제트 여객기로서 명예를 걸고 개발한 것이다.
록히드 사는 프로펠러기 시대에는 록히드 컨스텔레이션 시리즈로 한때 크게 성공했지만, 제트기 시대의 물결에는 뒤처져 군용기 제조사로서는 굴지의 대기업이 되었지만 민간기 시장에서의 지위는 저하되어 있었다. 또한, 베트남 전쟁 종전으로 인해 적자 경영으로 전락한 것도 맞물려 트라이스타를 통해 민간기 시장에서의 기사회생을 노리고 있었다.
하지만 제트 여객기 제조사로서의 실적이 앞서 있던 맥도넬 더글러스의 DC-10이나, 1970년에 초취항 이후 이미 많은 주문을 받고 있던 보잉 747과의 사이에서 치열한 판매 경쟁에 직면했다. 또한 L-1011 트라이스타에 탑재하는 롤스로이스 사제 터보팬 엔진 "RB211"은 개발이 지연되어 일본에서도 이미 전일본공수의 라이벌인 일본항공이 맥도넬 더글러스 DC-10을 대량 발주하는 등 다른 국가에서도 주문이 부진하여 고전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록히드 사가 각국의 정치인과 항공 관계자들에게 여러 가지로 교섭을 시도했다.
1970년 1월, 전일본공수(ANA)는 1972년도 도입을 목표로 “신기종 선정 준비 위원회”를 설치하고 미국에 조사단을 파견하는 등 노력했으나, 이후 전일본공수 시즈쿠이시 충돌 사고, 닉슨 쇼크로 인해 일시 중단되는 어려움을 겪었다. 1972년에 들어 선정 작업을 재개하였다. 당시 소음 문제가 부각되는 가운데, 전일본공수는 저소음성을 중시했는데, 애초에 저소음성 면에서 록히드 L-1011에 미치지 못하는 더글러스 DC-10은 오사카 공항에 설치된 소음 측정 지점에서 급상승하여 소음 측정을 회피하는 등의 행위를 보였다.
다나카 각료가 비자금 의혹으로 총리직에서 물러난 지 약 1년 3개월 후, 그리고 전일본공수(ANA)에 L-1011 트라이스타가 인도된 지 약 2년 후인 1976년 2월 4일, 미국 의회 상원에서 열린 외교위원회 다국적기업소위원회(처치 위원회) 공청회에서 록히드 사가 전일본공수를 비롯한 세계 각국의 항공사에 L-1011 트라이스타를 판매하기 위해, 1970년대 초 동 기종 개발 당시 각국 정부 관계자들에게 거액의 뇌물을 뿌렸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후 공청회에서 칼 코치안(Carl Kotchian)과 전 도쿄 주재 사무소 대표 존 윌리엄 클러터가 일본에서 로크히드사의 비밀 대리인 역할을 했던 고다마 요시오에게 700만달러(당시 일본 엔화로 약 21억엔)를 건넨 사실, 그리고 고다마 요시오으로부터 당시 수상이었던 다나카에게 5억엔이 비밀리에 건네졌다는 사실을 증언했다.
국회 예산위원회에는, 사건 관계자들이 증인신문되었고, 이 모습은 TV로 전국 생중계되었다.
5월, 록히드 사건 조사 특별위원회가 발족했다. 그 후, 록히드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이유로 니카이도 스스무 전 관방장관, 사사키 히데요 전 운수상, 후쿠나가 카즈오미 자민당 항공대책 특별위원장, 가토 무쓰키 전 운수정무차관이 거의 유죄에 가까운 회색 고관으로 여겨졌지만, 직무 권한 문제와 청탁이 없는 단순 수뢰죄의 3년 공소시효 성립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기소되지는 않았다.
이처럼 사건이 공개되고 수사가 진행되는 전후로, 록히드 사건을 추적하던 일본경제신문 기자, 코다마 요시오의 전 통역관 등이 잇따라 급사하면서, 언론과 국민 사이에서 "증거인멸과 연루를 막기 위해, 당사자의 하수인에 의해 암살된 것이 아닌가"라는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衆議院 예산위원회에서 여러 차례에 걸친 증인 소환과 5월 14일 衆議院(슈우기인), 5월 19일 参議院(산기인)에 설치된 “록히드 사건 관련 특별위원회” 등을 통해 증인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검찰 등의 수사가 급속도로 진행된 결과, 사건 발각 후 6개월도 채 되지 않은 7월부터 8월에 걸쳐 다나카 가쿠에이는 체포된 후, 수뢰죄와 외환관리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었고, 그 다음 날 보석 보증금을 납부하고 보석되었다. 다나카에 대한 공판은 1977년 1월 27일 도쿄 지방법원에서 시작되어 일본 국내는 물론이고 세계 각국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그 후 1983년 10월 12일에는 징역 4년, 추징금 5억엔의 유죄 판결이 선고되었다.
다나카는 이에 대해 "판결은 극히 유감이다. 살아있는 한 국회의원으로서 직무를 수행할 것이다"라고 말하며 항소했지만, 1987년 7월 29일 항소 기각되었고, 상고심 중이던 1993년 12월 16일 다나카의 사망으로 공소기각(심리 종결)되었다.
코다마는 사건의 핵심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1976년 2월,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증인 신문이 결정되자마자 “병”이라고 주장하며 자택에 은둔했고, 그 후에는 도쿄여자의과대학병원에 입원하여 임상 조사를 받는 등 그 태도가 큰 비판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관대한 대응을 허용한 정부와 특수부에 대한 비판도 집중되었다. 이후 코다마의 태도에 분노한 마에노 미츠야스가 같은 해 3월 '''코다마 저택에 대한 세스나기 자폭 테러'''를 감행했지만, 코다마는 다른 방에서 자고 있어서 무사했다.
그 후 1976년 3월 13일, 코다마는 소득세법 위반과 외환법 위반 혐의로 재택기소되어 재판을 받게 되었지만, 1977년 6월에 단 한 번 공판에 출두한 후 다시 "병"이라고 주장하며 자택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에 재판은 진행되지 않았다. 그 후 1980년 9월에 다시 입원했고, 재판 판결 직전인 1984년 1월에 코다마는 사망했다.
일본항공(ANA)이 유리한 정치적·경제적 배려를 받기 위해, 와카사의 지시를 받은 일본항공 간부들이 록히드로부터 받은 리베이트의 일부를 뒷돈으로 하여 운수족(運輸族) 정치인과 운수관료들에게 뇌물을 제공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이 사건은 "일본항공 루트"라고 불리며, 다치바나 다카시 등은 "일본항공만의 뒷돈만으로도 상당한 규모의 의혹에 이른다"며 "일본항공 의혹"이라고 부르고 있다.
운수정무차관 사토 타카유키와 전 운수대신 하시모토 토미사부로가 일본항공으로부터 금전 수수가 있었다는 이유로 수뢰죄로 기소되었다. 사토는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 추징금 200만엔의 유죄 판결이 확정되었고, 하시모토는 1·2심에서 징역 2년 6개월, 집행유예 3년, 추징금 500만엔의 유죄 판결을 받고 상고 중 사망하여 공소기각되었다.
록히드 사건은 미국 당국이 꾸민 음모라는 주장이 있다. 반면, 당시 특별수사부 검사로 수사에 참여했던 호리타 치카라는 뇌물 수수 사건은 실제로 발생한 것이며, 음모에 의해 폭로되거나 조작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사건 발각 당시 국제적인 음모는 없었다고 말한다.
중젠 코하루는 자신의 저서에서 당시 제럴드 포드 행정부의 국무장관이었던 헨리 키신저가 도쿄에 왔을 때, “록히드 사건을 저렇게 다룬 것은 잘못이었다”라고 중젠에게 말했고, “키신저는 이런 일은 해서는 안 된다고 반대했던 것 같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또한 같은 저서에서 “록히드 사건의 원점은 다나카 가쿠에이의 석유 정책에 있다”라고도 서술하고 있다.
그 외에도, 이 사건이 발각되는 과정에서 뇌물 제공 측 증인으로 촉탁 심문에서 증언한 록히드 부사장 코찬과 전 도쿄 주재 사무소 대표 클래터가 무죄는커녕 기소조차 되지 않은 점, 록히드사의 내부 자료가 상원 다국적 기업 소위원회에 잘못 배송되었다는 점 등을 들어 불가사의하다고 하여, 소련이나 아랍 국가로부터의 에너지 자원 직접 조달을 추진하는 다나카를 제거하기 위한 석유 메이저와 미국 정부의 음모였다는 설, 또는 중국과 급격히 접근하고 있던 다나카를 달가워하지 않던 미국 정부가 다나카를 배제하기 위한 의미가 있었다는 설이 타하라 소이치로가 쓴 기사 등에서 당시부터 유력한 설로 존재했다.
3. 4. 네덜란드
네덜란드 공군은 미라주 5 대신 록히드 F-104를 구매하도록 베른하르트 공에게 110.00000000000001만달러를 뇌물로 주었다.[74] 그는 세계 300여개 회사의 이사회에서 근무하였으며, 네덜란드의 경제를 이끌어가는 인물로 칭송받았다.[18] 당시 네덜란드 총리 요프 덴 아윌은 사건을 조사하였고, 베른하르트 공은 답변을 거부하면서 "나는 이런 것 위에 있다"고 하였다.[74] 이 결과로 베른하르트 공이 구속되었을 때 율리아나 여왕은 퇴진 위기에 몰렸다. 베른하르트 공은 이후 석방되었으나, 여러 공직에서 물러나야 했고 제복 착용권을 박탈당했다.[18]
베른하르트 공은 항상 혐의를 부인하였으나, 2004년 12월 1일 사망 이후 뇌물을 받았음을 인정하는 자료가 공개되었다. 그는 "내 무덤에 록히드라는 말을 새기라"고 하였다.[75]
3. 5. 사우디아라비아
1970년부터 1975년까지 록히드는 사우디아라비아 측 무기 거래상에게 1.06억달러의 수수료를 지불하였다. 수수료는 2.5%에서 시작하여 15%까지 늘어났다.[76] 록히드 국제 마케팅 부서의 당시 부부장에 의하면 그는 록히드의 마케팅을 전적으로 위임받았고, 록히드의 시장 진입, 전략, 컨설팅, 시장 분석을 모두 맡았다고 한다.[76] 당시 록히드 국제 마케팅 부사장이었던 맥스 헬젤(Max Helzel)에 따르면, 사우디 무기 중개상 아드난 카쇼기(Adnan Khashoggi)는 "사실상 록히드의 마케팅 부서가 되었다. 아드난은 접근 경로뿐만 아니라 전략, 끊임없는 조언과 분석을 제공했다"고 한다.[22]
4. 사건 이후
록히드 이사회 의장 다니엘 호턴과 회장 칼 코치안은 1976년 2월 13일 사건의 책임을 지고 사임하였다.[62] 이 사건은 1977년 12월 19일 지미 카터 대통령이 서명한 해외부패방지법(Foreign Corrupt Practices Act) 제정의 계기가 되었다. 이 법에 따르면 미국인과 미국 내 사업체는 외국 정부에 뇌물을 줄 수 없다.[77]
록히드의 스컹크 웍스 책임자였던 벤 리치는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5. 록히드 사건에 대한 논란
전직 록히드 로비스트 어니스트 하우저는 상원 조사관들에게 서독 국방부 장관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와 그의 당이 1961년 900대의 F-104 스타파이터 구매와 관련하여 최소 1000만달러를 받았다고 진술했다.[5] 해당 정당과 당수는 이러한 주장을 부인했고, 슈트라우스는 하우저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했으나, 주장이 입증되지 않아 문제는 종결되었다.[5]
1976년 9월, 1976년 서독 연방 의회 선거의 최종 단계에서 국방부 내 "록히드 문서"의 소재에 대한 질문이 제기되면서 논란이 재점화되었다. 익명의 소식통은 여러 개의, 아마도 위조된 문서를 언론에 배포했는데, 이 중 하나는 독일 연방의회 의원이자 국방위원회 위원인 만프레드 뵈르너가 록히드사의 초청을 받아 미국에 있는 항공기 공장을 방문했고, 여행 경비 전액을 록히드사가 지불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6] 조사 과정에서 스타파이터 구매와 관련된 대부분의 문서가 1962년에 파기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2] 1978년 1월부터 1979년 5월까지 연방의회 조사위원회는 이 문서들의 소재를 다시 논의했다.[2] 미국의 록히드 문서 조사 결과 뵈르너의 여행은 독일 연방의회가 자금을 지원했으며, 록히드 S-3 바이킹 시험 비행과 관련이 있었다. 록히드사는 뵈르너 비서 여행 경비의 일부와 뵈르너의 미국에서 독일로 돌아오는 항공권만 지불했다.
> 뵈르너는 비서와 동행했고, 비서의 경비 일부는 록히드사가 지불했습니다. 또한, 뵈르너는 정부가 지불한 독일로 돌아가는 항공권을 "분실"했고, 록히드사가 다른 항공권을 제공하여 "도와주었습니다".[7]
이 외에도, 록히드 사건에는 미국의 음모설, 기타 음모론 및 의혹 등이 제기되었다. (하위 섹션의 내용과 중복되어 간략하게 수정)
5. 1. 미국의 음모설
록히드 사건이 미국 정부의 음모라는 주장이 일부에서 제기되었다. 특히, 당시 국무장관이었던 헨리 키신저가 사건을 일으켰다는 의혹이 있다.[43] 이시이 하지메(전 국토청 장관·자치상)는 전해 들은 정보 등을 바탕으로 키신저 음모설을 『冤罪 田中角栄とロッキード事件の真相』(원죄 다나카 가쿠에이와 록히드 사건의 진상)에 기록했다.[44] 하루나 미키오는 강연에서 키신저 음모설이 거의 확실하다고 생각하여 『ロッキード疑惑─―角栄ヲ葬リ巨悪ヲ逃ス』(록히드 의혹―각영을 묻고 거악을 놓치다)를 저술했다고 말했다.[45]아사히 신문 편집위원 오쿠야마 토시히로는 저서 『秘密解除 ロッキード事件』(비밀 해제 록히드 사건)에서, 일중 수교와 일미 안보 조약을 둘러싼 다나카 가쿠에이의 행동에 대해 "일선을 넘어 닉슨을 이용하여 중국 공산당에 아부한 것과 마찬가지"라고 지적하면서, 오히라 마사요시 외무상과 미키 다케오 국무상이 일중 수교를 추진했음에도 미국 정부 수뇌부의 미움을 받지 않은 사정을 전제로, "키신저는 정책이 아니라, 그의 인격적인 측면에서 다나카를 몹시 싫어했으며, 그런 의미에서 다나카는 미국의 '호랑이 꼬리'를 밟았다고 할 수 있다"고 언급했다.[46] 하루나는 다나카가 미국의 의도보다 일중 수교를 더 적극적으로 추진한 것이 키신저의 분노의 원인이라고 주장한다.[44]
중젠 코하루는 자신의 저서에서 당시 제럴드 포드 행정부의 국무장관이었던 헨리 키신저가 도쿄에 왔을 때, “록히드 사건을 저렇게 다룬 것은 잘못이었다”라고 중젠에게 말했고, “키신저는 이런 일은 해서는 안 된다고 반대했던 것 같다”라고 기술하고 있다.[47] 또한 같은 저서에서 “록히드 사건의 원점은 다나카 가쿠에이의 석유 정책에 있다”라고도 서술하고 있다.[47]
이시하라 신타로는 자신의 저서 『천재』에서 자원 외교로 역린을 건드린 다나카 가쿠에이를 미국이 록히드 사건으로 몰락시켰다고 서술하고 있다.[48]
그러나 당시 특별수사부 검사로 수사에 참여했던 호리타 치카라는 뇌물 수수 사건은 실제로 발생한 것이며, 음모에 의해 폭로되거나 조작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사건 발각 당시 국제적인 음모는 없었다고 말한다.[42]
5. 2. 기타 음모론 및 의혹
다나카 가쿠에이 전 총리가 추진했던 자원 외교 정책과 중국과의 관계 개선이 미국의 심기를 건드려 록히드 사건이 폭로되었다는 설이 있다.[48][44] 이 사건과 관련하여 여러 의혹이 제기되었는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건 관련자들의 의문사: 사건을 추적하던 일본경제신문 기자, 고다마 요시오의 전 통역관, 다나카 전 총리의 운전기사 등이 잇따라 사망하면서 증거 인멸을 위한 암살 의혹이 제기되었다.[38][39][40]
- 불분명한 금전 전달 장소: 다나카 전 총리 측에 뇌물이 전달된 장소에 대한 진술이 석연치 않다는 의혹이 있다. 예를 들어, 호텔 오쿠라 주차장은 당시 폭설이 내렸고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곳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관련자들의 진술에는 눈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56][57]
- 검찰 수사의 문제점: 검찰이 금전 전달 장소를 여러 차례 변경하도록 유도했다는 증언이 나왔다.[56][57] 또한, 록히드사 부사장 등 미국인 관련자들은 기소되지 않은 점, 록히드사 내부 자료가 상원 소위원회에 잘못 배송되었다는 점 등도 의혹으로 제기되었다.[52][53][54]
- 미키 다케오의 정치적 의도: 당시 총리였던 미키 다케오가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검찰 수사를 이용했다는 의혹도 제기되었다.[49]
이러한 의혹들은 록히드 사건이 단순한 뇌물 사건이 아니라, 더 복잡한 배경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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